<관심>/먹는 거

2020 텃밭을 되돌아보며_상반기

라왕 2021. 3. 14.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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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갈 곳도 없고 스트레스 풀 곳도 없던 공시생 시절, 나의 마른 영혼을 달래주던 곳은 텃밭이었다. 비록 5~6평 남짓의 작은 임대텃밭이었지만 꽤 다양한 종류의 작물을 길렀고 그것으로 맛있는 음식도 해먹었다. 원래 계획은 매주 또는 매달 농사일지를 쓰는 거였는데 미루다가 이제야 한 해치를 몰아 쓴다.

 

풍요로움이 시작되는 6월의 어느 날, 시청 주관 임대텃밭 전경

 


쌈채소의 아름다운 추억

 

적상추, 겨자채, 치커리, 케일 (당귀, 샐러리는 망함)

 

청상추, 치커리의 1차 실패를 뒤로 하고 그 이후 심은 잎채소 아이들은 따뜻한 날씨에 힘입어 고맙게도 쑥쑥 자라줬다. 위 사진은 5월 중순쯤 찍은 사진인데, 정말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줘서 얼마나 풍요롭게 즐겼는지 모른다. 이때는 텃밭에 가기만 하면 한 봉지씩 수확해왔기 때문에 콧노래를 부르며 다녔다.

 

쌈을 먹기 위해 고기를 먹는다

 

쌈이 넉넉해서 5월 한달 간은 정말 쌈채소를 원없이 먹었다. 쌈채소가 너무 많아서 고기를 자주 구워 먹어야 할 판이었다. 엄마는 청상추를 좋아하시는데 많이 뜯어다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셔서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낭군님은 채소를 너무 많이 먹어서 초록색 똥(!)이 나온다고 할 정도였다.ㅎㅎ

쌈채소를 키워보니 몇 가지 기억해두고 싶은 점이 있다.

1. 날씨가 조금 추워도 좋으니 3월 말부터 쌈채소를 기르자.
2. 물은 땅이 흠뻑 젖을 정도로 두둑에 넉넉히 주자.
3. 케일은 무척 빨리 자라고 벌레가 잘 생기니까 최대 모종 5개만 심자.
4. 겨자채는 정말 맛있는데 천천히 자라기도 하고 몇 장 안 달리니까 모종을 10개 정도 심자.
5. 당귀랑 샐러리는 물을 많이 줘야 하니까 그럴 수 없으면 하지 말자.

 


 당근의 재발견

 

왼쪽부터 04.13. / 05.17. / 06.27.

 

당근은 항상 마트에서 잎이 떼어진 주황색 뿌리만 보아왔다. 그래서그런지 자라는 걸 보면서 가장 신기했던 작물 중 하나이다. 발아가 늦다고 하더니만 씨를 뿌리고 정말 한참 있다가 싹이 났고, 싹이 한번 난 이후부터는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지 아주 쑥쑥 잘 자랐다.

한줄로 줄뿌림을 했기 때문에 당근 새싹이 아주 촘촘하게 올라왔다. 큰 당근을 얻고 싶다면 솎음을 잘 해야 한다길래, 5월부터는 열심히 당근 새싹을 솎아왔다. 그럴 때마다 정말 한 줌 넘게 새싹이 생겼기 때문에 아까워서 버리지는 못하고 각종 요리에 넣어 먹었는데 글쎄 요놈, 물건이다. 약간 미나리처럼 쌉쌀한 것이, 당근향도 품고 있어서 느끼한 맛을 싹 잡아준다. 요리에 토핑으로 올리기도 좋고 전을 부쳐먹어도 좋았다. 집에 놀러왔던 친구에게 파스타 토핑으로 올리라고 줬더니 정말 상큼하고 맛있다고 극찬을 해줬지만 구하기 쉽지 않아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당근 새싹을 올린 골뱅이 무침 / 당근 새싹을 올린 전복 김 오일 파스타 / 당근 새싹 전 

 

 

 

 

손가락보다 작았던 미니 당근들이 쑥쑥 자라 어느 덧 제법 장성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왔다. 하지만 아쉬웠던 것은 너무 늦게 캤더니 가운데 줄기가 너무 자라 뿌리까지 침투해서 제대로 된 당근을 얻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솎은다고 솎았지만 너무 가까이 심었고, 영양분도 제대로 보충해주지 않아서 당근들이 다 너무 작거나 짧고 뚱뚱했다. 생애 첫 당근이니까 당근스럽게 생긴 것 몇 개만으로도 만족했지만, 내가 기른 채소들로 카레를 해먹는 게 꿈이기 때문에 다음 번에는 좀 더 공부를 많이해서 잘생긴 당근을 한 포대만 수확하고 싶다.


마음까지 풍요로워지는 구황작물, 감자

 

 

작년에 감자가 제법 잘 되었던 기억이 있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텃밭 두 이랑은 무조건 감자였다. 감자도 당근처럼 별다른 소식이 한동안 없다가 5월이 되자마자 갑자기 무섭게 자라기 시작하더니 한달만에 부쩍 자라서 6월엔 예쁜 하얀색 꽃을 가득 피웠다. 꽃을 꺾어줘야 감자에 더 많은 영양분이 간다길래 예쁜 감자꽃 부케를 만들어 한동안 집에 전시해뒀었다.ㅎㅎ

 

감자는 그야말로 '땅에서 캐는 노란 보물'이다

 

작년에는 씨알이 굵은 감자가 별로 없었어서 올해는 제얼도 하고 꽃도 따주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꽤 굵은 감자들이 많이 나왔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텃밭 자리가 모자랄 줄 알고 고작 씨감자 2kg밖에 안 심었다는 것이다. 2kg면 꼴랑 10개만 심었다는 것.. 나중에 엄청 번무하니까 이만큼이나 간격을 띄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널찍널찍하게 심었는데 감자 심는 영상을 보면 훨씬 더 좁은 간격에서도 잘 자라는 것 같다. 다음 번에는 30cm 정도만 간격을 두고 심어야겠다. 감자를 캐는데 희망을 걸 곳이 10개밖에 없다는 건 너무 잔인하다...... 그래도 위 사진에서 캔 양으로 둘이서 겨울까지 내 먹었다. 감자 조림도 하고 카레에도 넣어 먹고ㅎㅎ 캔 지 얼마 안 된 감자라 그런지? 수분이 촉촉하고 보드라워서 신기했다. 


화수분이 따로 없는 깻잎

 

 

심었던 작물 중에 기억에 남고 진짜 가성비 최고였던 것을 고르라고 하면 1위가 깻잎이다. 잎 수확용 들깨를 심었는데 한번 갈때마다 몇 백장이 나와서 실컷 먹고 항상 엄마도 두둑히 챙겨드렸다. 근데 처음부터 깻잎이 효자 작물은 아니었다. 다른 쌈채소 애들이랑 똑같이 4월 초에 심었는데 5월이 다 지나가도록 도저히 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좀 자라기는 자라는데 아주 살짝?만 겨우 밑둥이 조금 굵어지는 정도. 그러다 6월이 되자마자 장일작물 아니랄까봐 진짜 말그대로 폭풍 성장을 했다. 다음에 깻잎을 심는다면 너무 일찍 심지 말고 5월 중순 쯤 심어야겠다. 평소에 쌈 먹을때도 사실 상추보다 깻잎을 더 좋아하는 탓에 깻잎을 따면 너무 즐거웠다. 어느 날 도저히 그냥 먹는 걸로는 해결이 안되어 낭군님이 생 깻잎으로 장아찌를 해줬는데 향도 너무 좋고 진짜 좋은 반찬이었다. 깻잎은 한 그루에서 잘 자랄 때는 기본 100장이 수확되기 때문에 모종 2~3개 정도만 심어도 한 가족이 충분히 먹고도 남는다.  


달리고 또 달리는 고추

 

 

깻잎 외 또 다른 화수분 특징을 자랑하는 작물은 단연 고추. 엄마가 아삭이 고추를 워낙 좋아하셔서 아삭이 고추 몇 개랑 내가 꽈리고추를 좋아해서 또 몇 개를 섞어서 심었다. 고추는 5월 중순에 심어서 6월부터 쭉 수확을 하는데 2020년에는 6월 중순~말부터 비가 많이 와서 사실 그렇게 엄청 많이 수확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비오기 전까지 아삭이 고추가 정말 주렁 주렁 달렸고 맛도 좋아서 엄마가 엄청 좋아하셨다. 고추는 원래 진딧물이 잘 생기는데 주변 텃밭에서 하도 농약을 뿌려대서 그런지 우리 밭 고추도 별탈없이 잘 지나갔다. 나의 미래 목표는 고춧가루용 고추를 꽤 많이 심어서 잘 말린 후 김장용 고춧가루를 5kg 이상 빻는 것이다! 많이 심고 또 펼쳐 말릴 땅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장은 못 이루겠지만 말이다.. 그 전까지는 울 엄마가 여름 매끼 아삭이 고추를 너덧개씩 마음껏 먹을 수 있게 수확해다 주는 게 목표다.


기타 작물

 

 

 

위에서 언급한 작물 이외에도 기억에 남는 작물들이 많이 있다. 

1) 방울토마토
방울토마토는 기술이 부족해서 망했다. 고추랑 똑같이 끈만 매주면 되는 줄 알고 방치해뒀다가 순을 안 잘라줘서 덩굴처럼 막무가내로 자라나 수확이 별로였다. 그래도 어차피 비가 많이 와서 작년 토마토 농사는 전체적으로 잘 안됐으니 큰 손해는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다음 번에 심는다면 곁눈을 잘 잘라주고 관리를 잘 해줘서 제대로 길러보고 싶다.

 

나름 주렁주렁(?) 열린 방토 / 함께 심어두었던 바질과 함께 미니 샐러드로 즐겼다

 

2) 깍지콩
유럽에 있을 때 꼭 빼놓지 않고 사던 것이 깍지콩이었다. 그 담백하면서도 달큰한 맛이 얼마나 좋던지. 항상 끓는 소금물에 살짝 데쳐서 모든 볶음 요리에는 다 넣어 먹었는데 한국엔 잘 팔지 않아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반신반의로 씨앗을 구해다 심었는데 세상에, 너무 잘 자라고 양도 진짜 많았다. 잘 안될까봐 시험삼아 2~3개만 심었는데도 이 정도였는데 만약 10개 이상 심었다면 팔아도 될 정도의 양이 나올 뻔했다. 아무튼 오랜만에 마음껏 깍지콩을 먹어서 행복했다.

 

실날같이 작던 게 왕 많이 자라서 덕분에 맛있는 깍지콩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feat. 수확한 감자)

 

3) 바질
바질 페스토를 평소에 좋아해서 모종을 3개나 사다 심었는데 너무 너무 많이 자라나서 1개만 살걸 후회했던 작물이다. 그래도 덕분에 텃밭을 갈때마다 기분좋은 바질향을 느낄 수 있었고 샐러드, 페스토 소스 등으로 잘 먹었다.

 

땅에 옮겨 심으면 바질이 진짜 무서울 정도로 크게 자란다. / 홈메이드 페스토 파스타는 정말 맛있다!

 

4) 이웃의 정!!

 

 

내가 심은 건 아니지만, 인근의 텃밭을 가꾸시는 어떤 아주머니께서 나눠주신 가지, 아욱이 기억에 남는다. 깻잎이 너무 많이 나와서 좀 나눠드렸더니 거꾸로 주신 것이다. 가지도 그렇고 아욱도 그냥 몇 개만 심어놓으면 잘 자라는 작물들이고 가지무침, 가지볶음, 가지찜, 아욱된장국, 아욱무침 등 다양한 요리를 해먹을 수 있으니 다음번엔 조금이라도 꼭 심어야겠다.


공부를 하니 어디 멀리갈 수 없고, 코로나때문에 쉽게 외출하기도 어려웠던 2020년. 텃밭덕분에 갈 곳도, 할 일도 생겨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맛있었다! 상반기는 다양한 작물들 돌보느라 정신없이 즐거웠다면 하반기는 김장용 채소 돌보기로 또 다른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하반기 이야기는 이 다음 포스팅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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